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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에 대해 알아보자
사무라이
도쿠가와 시대의 첫째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찍이 그의 후계자들을 가르칠 지도 목록을 작성했다. 그 안에 칼은 사무라이의 영혼이다라는 글이 적혀 있는데 이 몇자 안되는 단어들이 일본 무사 계급의 전통적인 믿음과 생활 양식을 결정짓는다.
사무라이의 두 칼(다이쇼)은 지위의 상징이며 사무라이는 이것에 의해 살고 죽는다. 약간 휘어진 날과 안정되게 잡기 위해 손잡이가 커다란 가오리의 거친 가죽으로 싸인 긴 칼인 가타나는 사무라이의 중요한 무기였다.
모양은 가타나와 같지만 길이가 짧은 와키자시는 일대일 싸움에서 쓰였는데 싸움에서 만약 패배할 경우 하라키리(활복 자살)를 행하여 주인의 불명예를 씻어주는 칼이었다.
칼이 항상 일본 무사들의 중요한 무기였던 것은 아니다. 사무라이의 선구자, 서기 300년대 부터 황제와 귀족들의 가족 집단으로 구성된 귀족 신분인 부시(무사)는 활을 쏘는 사수들이었다. 그들은 서기 1000년대에 사무라이(봉사하는 사람)라고 불리는 대규모의 전문적인 군사 집단에게 패배하였다.
사무라이는 종종 멀리 나가는 화살을 서로 쏘는 전쟁을 함으로써 사수의 기술을 보전하였다. 그러나 사무라이는 주로 나기나타(언월도)라 불리는 칼을 가지고 일대일 싸움을 하는 보병들이었다.
단단한 막대기에 3m 정도의 긴 칼날이 있는 나기나타는 절의 자위를 위해 있었던 승병들에게 애용되었다.
사무라이에게 지위는 단지 다이묘(봉건 군주)에게 봉사하는 동안만 유효했다. 만약 그의 군주가 다른 사람에게 패하거나 군주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면 사무라이는 자신을 고용해 줄 누군가를 찾기 위해 방랑하는 용병인 로닌(낭인)이 되어야 했다.
서구에서 인기있는 일본 시대극에 등장하는 사무라이 중에도 로닌이 많다. 어떤 로닌은 서구의 대중 매체에서 흔히 영웅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곤 하는데 검은 옷을 잘 차려입은 특별히 훈련된 뛰어난 스파이와 암살자인 닌자가 되기도 했다.
1100년대 ~1300년대에 사무라이의 행동은 부시도 법전(전사의 길)에 의해 다스려졌다. 부시도는 사토리(정신적 완성)가 자기 훈련을 통해서 달성 된다고 가르치는 젠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사무라이에게 이것은 전쟁 기술의 개발 검소한 생활 양식의 채택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군에 대한 충성심의 강조를 의미했다.
사무라이는 어느때라도 천황을 위해 그의 다이묘를 위해 또는 자신의 개인적인 명예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를 해야만 한다. 사무라이는 자신의 안락함과 안전은 무시해야 하며 만약 패배했을 경우에는 항복하기보다는 할복해야만 한다.
부시도 법전은 1700년대~1800년대에 처음으로 활자로 남겨졌는데 이것에 의하면 사무라이는 항상 죽을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승려 출신의 사무라이인 야마모토 요코는 이것을 간단하게 사무라이의 길은 죽음이다라고 표현하였다. 도쿠가와 쇼군 시대에 사무라이는 전체 인구에서 5~7%를 넘지 않았던 작은 특권 계급이었다.
일본이 평화로운 시절일때 이들은 지방 관리, 행정가 그리고 지주가 되었다. 단지 사무라이만이 무기를 지닐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그리고 영화 전쟁의 예술에서 보여진 어떤 것들은 오늘알 사무라이와 관련되어 있다. 아이키도(합기도)와 요도(막대기로 싸우는 것)같은 것은 사실상 포악한 사무라이의 침입에 대항하여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농민들이 개발한 것이다.
1868년에 천황이 황권을 회복하고 일본이 급속히 현대화되자 1871년에 진귀한 계급인 사무라이 계급은 몰락하였다. 많은 사무라이들은 오늘날 일본의 경제 생활을 지배하는 거대한 가족 소유 회사를 설립한 상인이 되었다.
새로운 방식에 반대하는 다른 사람들은 왕실 호위대 대장인 다카모리 사이고가 주동한 반란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사이고의 1만 5000명의 사무라이들은 1877년 시로야마 전투에서 서구식으로 조직된 군대에 의해 패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라이 정신은 살아 있다. 일본의 군인을 위한 새로운 법전인 군이과 선원에 대한 천황의 포고령은 의무는 산보다 무겁고 죽음은 깃털보다 가볍다라고 규정함으로써 사무라이의 충성심과 자기 희생의 덕을 강조했다.
사무라이 정신은 일본인들이 우리는 이제 모두 사무라이다라는 생각을 갖도록 했다. 일본인의 무사도 전통은 1904년~1905년의 러일 전쟁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 때 일본 군대는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육탄으로 맞서서 대항하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제 2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5000여 명의 일본 공군 비행사들이 적의 배에 육탄으로 뛰어드는 가미카제 자살 공격을 감행하였다. 사무라이의 신념에 의하면 항복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최고의 불명예라고 여겼기 때문에 일본군은 항복한 연합군 포로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했다.
전쟁이 끝나고 그들의 국가가 황폐해졌을때 일본 군대의 많은 지휘관들이 할복했다. 그러나 사무라이의 진정한 후계자들은 아마도 참을수 없는 일본의 항복을 참고 국가의 재건을 위해 일한 사람들일 것이다.